보에몽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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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으로, 1107년 또는 1108년에 보에몽 1세와 콩스탕스 드 프랑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망으로 타란토 공국의 통치를 어머니에게 맡겼으며, 성장 후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돌아와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보에몽 2세는 킬리키아 원정 중 사망했으며, 그의 딸 콘스탄스가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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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몽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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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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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앙티오키아 공 |
통치 기간 | 1111년 또는 1119년 – 1130년 |
이전 통치자 | 보에몽 1세 또는 루지에로 |
후임 통치자 | 콩스탕스 당티오키 |
섭정 | 탄크레도 디 오트빌 (?) 루지에로 디 살레르노 (?)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 |
직위 1 | 타란토 공 |
통치 기간 1 | 1111년 – 1128년 |
이전 통치자 1 | 보에몽 1세 |
배우자 | 알리스 드 예루살렘 |
자녀 | 콩스탕스 당티오키 |
가문 | 오트빌 가문 |
부친 | 보에몽 1세 |
모친 | 콩스탕스 드 프랑스 |
출생일 | 1107년 또는 1108년 |
사망일 | 1130년 2월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생애 | |
프랑스어 이름 | Bohémond II d'Antioche |
이탈리아어 이름 | Boemondo II d'Antiochia |
통치 | |
계승 | 그는 어린 나이에 앙티오키아 공으로 계승되었다. |
추가 정보 | |
관련 전투 | 아제르 상기니스의 전투 |
관련 조약 | 데아볼리스 조약 |
2. 유년 시절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와 프랑스 공주 콩스탕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출생 연도는 1107년 또는 1108년으로 여겨진다.[1] 1104년, 아버지 보에몽 1세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고, 부재 기간 동안 조카 탕크레드에게 안티오키아 통치를 위임했다. 1108년에 발급된 두 개의 칙허장에는 탕크레드가 "안티오키아 공작"으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해 9월, 보에몽 1세는 데볼 조약을 체결하여 사후 안티오키아 공국이 동로마 제국 영토에 병합될 것이 결정되었다.
1111년, 보에몽 1세가 풀리아에서 사망하면서 아들 보에몽 2세가 타란토 공국을 상속받았으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콩스탕스가 섭정을 맡았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탕크레드에게 안티오키아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탕크레드는 거부했다. 1112년 탕크레드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살레르노의 로저가 안티오키아 통치를 이어받았다.
(이후의 내용은 '불분명한 계승 구도'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생략)
2. 1. 불분명한 계승 구도
보에몽 2세는 타란토와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 보에몽 1세와 프랑스의 콩스탕스의 아들이었다.[2] 그는 1107년 또는 1108년에 태어났다.[1] 1104년, 보에몽 1세는 비잔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자 유럽으로 돌아갔고, 그의 조카 탕크레드를 안티오키아 공국 섭정으로 임명하여 시리아에 남겨두었다. 두 개의 헌장에 따르면 탕크레드는 1108년에 스스로를 안티오키아 공작으로 칭했다. 그해 9월, 보에몽 1세는 비잔틴 제국이 그의 사후 안티오키아를 병합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데볼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보에몽 1세는 1111년 아풀리아에서 사망했다. 보에몽 2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그의 어머니가 타란토 공국의 통치를 맡았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탕크레드에게 안티오키아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탕크레드는 이를 거부하고 공국을 계속 통치했다. 탕크레드는 1112년에 사망했고 안티오키아를 그의 조카 살레르노의 로저에게 유증했다.
안티오키아에서 로저가 통치하는 동안 그의 법적 지위는 불확실했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탕크레드는 로저를 그의 후계자로 만들면서 "보에몽이나 그의 상속인이 요구할 경우 돌려주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하에 로저가 어린 보에몽의 섭정이었음을 시사했다. 로저는 공작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를 안티오키아의 통치자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동시대인인 샤르트르의 풀처는 로저가 "그의 영토에서 보에몽 [1세]의 아들로 아풀리아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자를 박탈했다고 비난했다. 1117년과 1119년 사이에 보에몽의 이탈리아 영지에서 발행된 헌장은 그가 안티오키아 공작의 아들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를 공작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1119년 6월 28일 피의 들판 전투에서 로저와 대부분의 안티오키아 귀족들이 사망한 후, 예루살렘의 발두인 2세는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통치자 일가지로부터 안티오키아를 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급히 갔다. 안티오키아의 유력자들은 발두인을 안티오키아의 통치자로 선포했지만, 재상 월터에 따르면 그들은 안티오키아가 보에몽의 "정당한 상속"임을 강조했다. 발두인은 보에몽이 공국으로 오면 안티오키아를 보에몽에게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에몽이 발두인의 딸 앨리스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보에몽이 공국을 떠나 있는 동안 만들어진 보조금을 되찾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1123년 발두인 2세가 포로로 잡히자, 안티오키아의 시민들은 보에몽에게 사절을 보내 공국으로 올 것을 촉구했다. 보에몽은 16세에 성년이 되었다.[1]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그는 아풀리아의 윌리엄 2세 공작과 먼저 자손 없이 죽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공국을 유증한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윌리엄의 보고의 신뢰성은 의심스럽다. 텔레세의 알렉산더는 보에몽이 시리아로 떠나기 전에 그의 이탈리아 영지를 교황청에 맡겼다고 기록했지만, 살레르노의 로물알드는 그가 콘베르사노의 알렉산더 백작을 그 땅의 감독관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보에몽은 1126년 9월에 24척의 함대를 이끌고 오트란토를 출발했다.
3.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2세는 1126년 10월 또는 11월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생 시메온 항구에 상륙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를 만나기 위해 안티오키아로 갔고, 보두앵 2세는 그에게 안티오키아를 양도했다. 보에몽은 보두앵의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안티오키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에데사의 마태는 보에몽을 "강력한 인물이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로 묘사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작이 된 직후 카파르타브를 점령했지만, 1127년 초에 신속하게 요새를 탈환했다. 역사학자 스티븐 런시먼에 따르면, 보에몽이 우사마 이븐 문키드에 의해 기록된 샤이잘의 문키디테스에 대한 공격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1129년 11월, 암살단과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인 타지 알-물루크 부리 간의 분쟁을 틈타,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는 다마스쿠스 영토를 침공하여 바니아스를 포위했다. 보에몽은 보두앵 2세와 함께 이 원정에 참여했지만, 폭우로 인해 십자군은 포위를 포기해야 했다.
3. 1. 에데사와의 갈등
보에몽 2세는 1127년에 에데사의 조슬랭 1세와 갈등을 겪었다.[1] 하지만 두 기독교 통치자 간의 적대감의 이유는 자료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1] 스티븐 런시먼에 따르면 조슬랭은 모술의 총독이었던 악순쿠르 알-부르수키로부터 이전 안티오키아 공국 영토를 빼앗았다. 또한 보에몽은 살레르노의 로저 2세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살레르노의 마리아에게 지참금으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자즈를 조슬랭에게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다.[2] 보에몽이 원정을 나가 부재중인 틈을 타 조슬랭은 튀르크 용병의 도움을 받아 안티오키아를 침공하여 국경을 따라 마을을 약탈했다.[2]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인 발랑스의 베르나르는 에데사 백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2]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는 1128년 초에 보에몽과 조슬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시리아로 급히 갔다.[2] 심각한 병을 앓고 있던 조슬랭은 보에몽에게 재산을 반환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보에몽과 조슬랭 간의 갈등은 모술 총독으로서 일-부르수키의 후임자인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6월 28일에 저항 없이 알레포를 점령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3. 2. 이탈리아 영토 상실
보에몽 2세는 1127년 7월 25일 사촌인 아풀리아 공작 굴리엘모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 내 영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2] 굴리엘모 2세 사후,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2세 (굴리엘모와 보에몽의 사촌)가 아풀리아 점령을 시도했고,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중단 권고에도 불구하고 1128년 5월 보에몽의 이탈리아 영토를 침공했다. 루지에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타란토, 오트란토, 브린디시를 연이어 점령하고, 1128년 6월 15일에는 보에몽의 이탈리아 영토 전체를 지배하에 두었다.3. 3. 킬리키아 원정과 죽음
보에몽 2세는 1130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격하여 아나자르부스 등 과거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는 1130년 2월 세이한 강을 따라 킬리키아로 진군했다. 킬리키아의 레오 1세는 다니스멘드 에미르인 가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가지는 보에몽의 군대를 기습 공격했다. 보에몽과 그의 군대는 이 전투에서 몰살당했다. 시리아의 미카엘에 따르면, 튀르크인들은 보에몽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는데, 만약 알아보았다면 그를 생포하여 몸값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한다. 귬쉬테긴은 보에몽의 머리를 방부 처리하여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에게 보냈다.4. 가족
보에몽 2세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의 둘째 딸 알릭스 드 부르와 결혼했다.[1] 이들 사이에는 콘스탄스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1130년 보에몽 2세가 전사했을 당시 콘스탄스는 2세였다.[2] 알릭스는 딸 콘스탄스의 섭정이 되려 했으나, 안티오키아 귀족들은 알릭스 대신 보두앵 2세를 섭정으로 지지했다.[2] 보에몽 2세 사후,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콘스탄스에게는 행사하지 못했다.
관계 | 이름 |
---|---|
아내 | 알릭스 드 부르 |
장인 | 보두앵 2세 |
딸 | 콘스탄스 |
참조
[1]
웹사이트
Bohemond II Prince of Antioch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6-05-03
[2]
웹사이트
Bohemond II Prince of Antioch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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